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미니카 내전 (문단 편집) == 미군의 개입 == 레이드 대통령이 쫓겨날 당시, 폭도들은 점점 무질서해지고 경찰관을 처형하는 등 잔혹행위를 일삼았다. 비록 이런 혼란상에서 미국 민간인들은 단 한명도 죽지 않았지만, 미국은 어쨌든 다른 외국인 시민들과 함께 그들을 긴급히 대피시키려고 했다. 그러나 주도미니카 대사 윌리엄 태플리 베넷이 본국 정부로 보내는 전문에서 헌정파를 [[쿠바]]가 지원한 "[[공산주의자]]"로 싸잡아 몰아붙이고 즉각적인 무력개입을 요청하자[* 게다가 베넷은 27일 헌정파 지도자들과 가진 회동에서 그들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모멸하는 언동을 취하여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. 카아메뇨 대령은 아예 "죽을 때까지 싸울 것"이라고 맹세했다.] 제2의 [[쿠바 혁명]]이 보고싶지 않았던 [[린든 B. 존슨]] 대통령은 기존의 대피 작전을 대규모 무력개입으로 전환했다.[* 다만 그 이전에도 주도미니카 미국 대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미 해병대 500명이 상륙하기도 했다. 다만 이것은 미국 민간인과 관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고, 중요한 것은 이후 미국이 아예 점령을 전제로 한 무력개입을 결정했다는 것이다.] 4월 30일 2시 16분 [[제82공수사단]] 3여단이 산토도밍고에서 동쪽으로 25km 떨어진 산이시도르 공군기지에 착륙했다. 몇시간 후 2개 여단전투단과 중장비가 추가로 급파되었다. 16시 30분 충성파와 헌정파, 미군은 23시 45분 발효 예정인 휴전협정에 조인했다. 5월 5일 [[미주기구]] 평화위원회가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여 추가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. 미주기구 평화위원회는 전반적인 평화프로세스 및 식량과 의약품의 분배를 감독하기로 했다. 또한 5월 중순 미주기구는 미군을 줄이고 그 빈자리를 미주평화유지군(IAPF)으로 대체하기로 했다. 23일 정식으로 발족한 IAPF는 총 병력 1,748명으로 [[브라질]], [[파라과이]], [[니카라과]], [[코스타리카]], [[엘살바도르]], [[온두라스]]에서 파견되었다.[* 대부분(1,130명)은 브라질에서 왔다. 온두라스에서 250명, 파라과이에서 184명, 니카라과에서 160명, 코스타리카 21명, 엘살바도르에서 3명이 파견되었다.] IAPF의 창설에 맞추어 미군도 26일부터 점진적으로 도미니카에서 철수했다. 6월 15일 헌정파가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충성파와 미군, IAPF의 방어에 패배했다. 충성파의 수장이었던 웨신은 9월 10일 미국 [[마이애미]]로 망명했다. 10월까지 주도미니카 미군의 병력은 8,500명으로 줄어들었다. 1966년 7월 1일 대선에서 [[사회기독개혁당]] 후보 호아킨 발라게르가 보슈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. 9월 21일 마지막 미주기구 소속 평화유지군 병력이 도미니카를 떠나 도미니카 내전이 종료되었다. 도미니카 내전에 투입된 미군은 총 42,600명에 달했다. 미군은 전사자 44명, 부상자 283명을 냈고, IAPF는 부상자 11명을 냈다. 도미니카인 사상자는 총 7,275명(사망자 4,275명, 부상자 3,000명)에 달했다. 그 가운데 충성파 전사자는 825명(군인 500, 경찰 325), 헌정파 전사자는 600명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